행복한 가족, 패밀리그램

오늘의 pick/사회, 문화

땡전 한 푼 없다의 어원을 아시나요 ?

패밀리그램 2025. 5. 23. 08:00

"땡전 한 푼 없다"의 슬픈 역사: 상평통보의 몰락과 당백전의 그림자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상평통보 갤러리

 

 오늘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땡전 한 푼 없다"라는 표현 속에 숨겨진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돈이 없다는 뜻을 넘어, 조선 시대 경제의 격변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그 중심에는 바로 상평통보당백전이라는 두 가지 화폐가 있습니다.

 

조선 경제의 안정화를 꿈꾼 화폐, 상평통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상평통보 갤러리

 

 1678년(숙종 4년)에 등장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조선 후기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화폐입니다. 이전까지 쌀이나 베와 같은 현물을 주로 사용했던 거래 방식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표준화된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상업 활동을 촉진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상평통보는 액면가와 실제 가치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화폐였습니다. '상평(常平)'이라는 이름처럼, 물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죠. 초기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널리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 경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마치 든든한 버팀목처럼 조선 경제를 지탱하는 듯 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야심찬 계획, 최악의 결과, 당백전의 등장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당백전은 일당백의 이미를 갖고있다고 한다

 

 상평통보의 가치 하락과 경제 혼란 속에서,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1866년(고종 3년)에 발행된 당백전(當百錢) 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하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상평통보 1개의 가치를 100배로 설정한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한 것입니다. 이는 단번에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지만, 시장 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당백전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액면가와 실질 가치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당백전을 상평통보의 5~6배 정도의 가치로 평가절하했습니다.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물가가 폭등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당백전은 흥선대원군의 재정 확보에는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시장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린 실패한 정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치 폭탄과 같았던 당백전은 조선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당전 한 푼 없다"에서 "땡전 한 푼 없다"로

 

https://namu.wiki/jump/DBB7kmhpURU9CQUMwJH12dm7i%2FiSgrm6NGVeOpSAdmuB2gO5MG1nwLR%2FxPIlIoDY5YxJImovuSKd9LMQiqwjUg%3D%3D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당백전 시대에, 사람들은 "당백전 한 푼도 없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을 것입니다. 워낙 가치가 불안정하고 실질적인 구매력이 낮았기 때문에, 고액의 당백전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된 물건 하나 사기 어려웠던 시절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담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당전(當錢)"이라는 발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땡전"이 되었다는 설입니다. '당전'의 '당'이 '땡'으로 바뀌는 음운 변화를 거쳐 "땡전 한 푼 없다"라는 표현으로 굳어졌다는 것이죠.

 "땡전 한 푼 없다"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 속에 조선 시대 경제의 흥망성쇠와 백성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상평통보의 몰락과 당백전의 실패는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경제 정책이 얼마나 신중하게 결정되고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